당신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요? (학교신문)

당신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요?

 

 

작년 1월이었던가, 동료교수님이 제게 얼마전 졸업한 제자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아, 그 학생 지금 외국유명건축사사무실 취업하려고 포트폴리오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게 뭐 쉽다고 그러고 있나요, 그냥 우리나라 좋은 사무실 취업하지.”

동료교수님의 예상과는 달리 그 여졸업생은 (여성임을 밝히는 이유는 더 자랑스럽기 때문입니다.) 몇 달 뒤 두 군데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건축사사무실에서 취업오퍼를 받았고, 3개월의 인턴생활 뒤에 지금은 정식사원이 되어 정열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물론 교수에게 터놓기 힘든 어려움도 분명 있겠지만, 가끔 오는 연락을 보면 매우 즐겁게 일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의 행보를 보며, 건축계에서 꽤 인정받는 우리 학교 건축대학의 일원인 나도 어느샌가 우리 학생을 보며 보이지 않는 상한선을 그어버린게 아닌가 큰 반성을 했습니다.

 

2019년 신학기에 우리 신입생 학생들에게 생각할 주제로 던진 화두는 ‘나의 한계는 어디인가’였습니다. 소위 ‘객관적인 지표’라고 생각되는 내신성적이나 수능성적으로 우리는 시작도 하기 전에 자신을 커다란 위계나무 아래 어딘가에 위치시킵니다. 그리고 서로 암묵적으로 그 좌표안에서 살면서, 몇 mm를 아래위로 움직이면서 그 작은 성취속에서 큰 만족감을 느끼며 지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런 숨어있는 좌절감은 이 덜떨어진 사회속에서 더 확대재생산됩니다.) 선생님인 나조차도 학교에 오래 있게되니, 제자의 작업을 보며 ‘이 정도면 꽤 괜찮은 것 아닌가’라는 식으로 만족하는 확률이 점점 늘고 있음을 느낍니다. 왜냐면 그게 편하니까요. 사실 세상의 모든 일은 소위 통용되는 정도에서 나아가 5%만 더 잘 하기 위해서도 50% 이상의 에너지를 더 투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건축설계스튜디오에서 웬만한 ‘적당한’건물이미지를 만드는데 하루가 걸린다면, 그 이미지의 색감이나 각도, 선의 굵기 그리고 질감 등을 미묘하게 조정하여 완벽한 이미지를 만들려고 하면 적어도 사흘이 걸립니다. ‘이 정도면’ 되는데 뭔가를 더 요구하는 교수님을 여러분도 부담스러워 하지 않으셨던가요?

 

부임초에 제가 모르던 저의 숨은 별명은 ‘목조르는 교수’였다고 합니다. 제자가 컴퓨터에서 작업하는 것을 보면서 제가 어깨에 양손을 엊고 흔들며 독려하는 모습이 멀리서 보니 목을 조르는 것처럼 보였다고 하더군요. (이 제자는 남자였음을 밝힙니다. 물론 요즘에는 누구든 절대 만지지 않습니다만.) ‘방금 부임한 교수는 다 가르치려고 한다’는 농담처럼 제자들에게 앞뒤안가리고 마구 가르치던 시기였던 듯 합니다. 이 농담의 끝은 ‘휼륭한 교수는 학생이 알만큼만 가르친다’라고 끝나던가요. 하지만 묻습니다. 당신의 지적 한계는 정해져있나요? 누가 당신을 이 정도, 여기 정도 있으면 충분하다고 설득했나요? 적당하니까 만족해라고 얘기하는 이는 누구인가요? 우리의 한계를 결정지워 버리는 요소들은, 의외로 우리와 정말 가까운 이들일 수 있으며, 그런 이들 중에는 –그래서는 안되지만- 여러분의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바로 그런 존재일 수 있습니다. (가장 많은 예는 졸업하고 자주 찾아오는 선배더군요. 보통 뭔가를 이룬 선배는 찾아가지 않으면 못 만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한계지워짐을 인정하는 주체는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듯 합니다. 적어도 20대에게는 절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