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스티지 magazine

테크놀러지와 건축

 

우리의 삶과 테크놀로지는 이제 마샬 멕루한이나 다른 미래학자의 사고속에서만 존재하는 격리된 비젼이 아닌 이제 생활과 분리하여 생각하기 어려운 개념이 되었다. 신학에서 신의 존재가 세상 도처에 어디나 있음을 표현하기 위한 개념인 편재(Ubiquity)는 이제 테크놀로지를 설명하는 키워드가 되고 있으며 형용사격인 ubiquitous는 광고에서까지 쓰이는 일상적인 표현이 되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정확히 기억안나는 부분들을 인터넷에서 찾는 나에게 있어서 인터넷은 나의 기억의 연장extension이 되고 있다. 그러나, 휴대폰, pda, 무선인터넷 전에도 사실 우리에게 있어서 편재되어 있는 테크놀로지는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는 우리가 사는 환경의 많은 부분을 정의하는 건축에 녹아들어 있다.

 

발명가 에디슨 (Thomas Alva Edison 1847-1931)에 의해서 발명된 인공조명인 전구는 건축자체의 큰 변화를 일으켰다. 인공조명이 없던 시절에 건축의 가장 중요한 화두 중에 하나는 채광이였으며, 이는 자연에서 얻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는 건축의 깊이, 폭을 제한하게 되었으며 우리나라의 한옥이든, 혹은 르네상스 시대의 팔라쪼든 마당이나 중정을 두고 건물이 일정한 두께로(채광 때문에 그 두께의 폭은 한계가 생긴다.) 이 공간을 안아서 둘러쌓는 것은 채광을 위한 자연스러운 접근이였다. 이제는 철거된 구중앙박물관의 건물배치가 일본이라는 나라의 한자 日과 형태적으로 유사하여 그 건물이 서울의 중앙에 위치한 것을 매우 큰 수치로 여겼지만, 사실 그런 날 일자의 배치는 고전주의 건축에서는 흔히 발견되는 형태였으며, 이는 앞의 이유에 연유한다. 일정 이하의 깊이를 가지는 내부 공간과 건축의 입면(파사드, 밖에서 건물을 볼 때 보이는 면)은 상당한 상관함수를 가지고 있었으며 입면은 이런 관계를 표현하기 위한 캔바스이고 장치였다. 그러나 인공조명의 발달로 인해서 건물의 깊이는 그 한계를 극복하기 시작하였으며, 자연채광과는 관계없이 건물의 깊이는 확장되어 왔다. 어느 건축가는 이런 깊이의 확장 때문에 더 이상 입면과 내부공간의 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이런 생각은 다른 많은 건축가들에게 공감을 일으키고 있다.

 

에디슨이 건물의 한계 깊이를 파괴한 인물이라면, 건물의 한계 높이를 파괴한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상용화 시킨 오티스(Elisha Graves Otis)였다. 1854년 뉴욕박람회에서 그는 줄이 끊어져도 안전한 엘리베이터를 직접 시범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이는 현재의 엘리베이터들이 안전한 원리와 동일하다. 즉, 줄이 끊어졌을 때 엘리베이터 외부에 설치되어 있는 장치가 옆의 레일을 꽉 붙잡아 서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것조차 가끔 오작동 하기는 하지만 이 작은 박스를 타는데 있어 인간의 두려움을 없애는 데는 큰 역할을 한다.), 1857년 사람이 탑승하는 엘리베이터를 수주하는데 성공하며 회사는 아직도 번창하고 있다 (역시 어떤 비즈니스건 선점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후 고층건물이라는 새로운 타입의 건물형태가 상상에서 현실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이는 현대적인 도시형성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아파트 공동주거문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결국 엘리베이터의 발명은 건물의 높이의 한계를 파괴하였으며 땅과 항상 밀접한 관계를 갖던 건축은 땅을 떠나 비상하게 된다.

 

앞의 두 예처럼 혁명적일 수는 없겠지만, 미래의 주거문화와 관계해서 유심히 보고 있는 테크놀러지는 무인경비시스템과 홈네트워크이다. 이 두가지 테크놀러지에 의해서 이제 단독주택은 새롭게 평가 받을 것이다.

 

세콤이나, 캡스, KT텔레캅으로 대표되는 무인경비시스템은 이제까지 단독주택이 공동주거형태와 비교해서 항상 열악한 조건을 가지고 있던 방범에 대해서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제 더 이상 누군가가 단독주택을 ‘지키고’ 있을 필요가 사라지게 되며 기존 아파트의 허수아비 경비보다 더 철저히 주택을 보호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이를 광의적으로 얘기하면, 재산과 인명의 보호라는 측면에서의 전통적인 건물의 기능과 형태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즉, 어렸을 때 보았던 담장위의 꽂힌 깨진 유리보다, 열린 담위에 무인경비시스템의 로고하나가 더 위력적인 시대로 우리는 들어서고 있다. 아마도 ‘지킨다’는 건물의 형태가 유지될 건축은 형무소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이 또한 CCTV의 발달로 많은 변화를 겪고 있지만.)

 

게다가 홈네트워크는 필요한 모든 설비를 원격제어가 가능하게 하고 있으니, 이제 공동주택과 단독주택의 편의성은 어떤 주택이 더 잘 구비(테크놀러지적으로)되어 있는가에 의해서 판가름이 날 뿐이다. 건물은 사람의 손을 점점 덜 ‘타고’ 있으며 이제 건물은 사람의 한계에서나마 멀어져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즉, 인간의 동선이나 움직임의 편의성에 의해서 결정되던 건물의 내부 형태나 레이아웃마저도 더 이상 건물을 결정짓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장황하게 ‘건축디자인의 당위성의 헤체’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은 더 이상 ‘건축을 건축답게’ 만드는 외부적인 인자들이 줄어들고 있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흔히 사람들이 질문하는 내용이 ‘어떤 건물이 좋은 건물인가’, 혹은 ‘어떤 건물이 아름다운 건물인가’에 대한 것이다. 결론을 먼저 말한다면 이제 이런 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은 더 이상 없다. 모든 것이 자유로와 졌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무엇이든' 가능해진 건축의 세계는 더더욱 혼란을 가중시켰으며, 그 예들은 우리 주위에 가득차 있다. 몇 년도 못 갈 유행을 따른 건물들, 기능으로 포장되었으나 실상 전혀 기능적이지 않은 건물, 이미 지나간 위엄에 기댄 관공서의 건물들.

 

이런 시대일수록,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건축가/건축주의 세계관, 즉 세계에 대한 태도이다. 보편적인 정답은 없다. 그러나 각각의 주체에게 적합한 각각의 정답은 존재한다. 문제는 그런 해결안을 찾을 수 있는 노력이다. 주거의 예를 보더라도, 정말 당신의 가족에 맞는 집이 방 5개, 화장실 3개, 주방, 다용도실, 거실로 구성되어 있는 집인가? 그런 객관식의 문항처럼 구성된 집이 당신의 집인가? 왜 화장실은 항상 방보다 작아야 하는가? 집이 수면과 간단한 휴식으로만 쓰인다면 가장 소중한 공간은 그중에 화장실과 샤워실이 아닐까? 그런 집에 안방보다 더 큰 화장실이 있다는 것이 이상한 것일까? 설사 앞의 객관식적인 주거라도 그 레이아웃과 입면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할 것인가?

 

천편일률적이지 않고 정형화되지 않은 것들이 오히려 정당함을 얻는 시대가 왔다. 문제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이런 감수성을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용기이다.